어제, 응급실을 다녀왔다. 프랑스에 온 지 5달, 응급실 두 차례. 이 경력만으로도 나는 혼자서 얼마나 나약한지를 증명하는 셈인 것이다. 얼굴에 여기저기 핀 열꽃이 못 견디도록 화가 나서 많이 울었다. 울면서도 진지하게 나는 항우울제가 아직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프랑스에 오고 나서, 언젠가부터 흔들린 마음은 이토록 자리를 못 잡고 있었다. 이럴 때면 내가 일반인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고찰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는 내게 합리성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비문학보다 문학을, 수학보다는 국어를 더 좋아했던 내게 이 시간들은 아주 벅차다. 우선 나는 너무 잘 운다. 정신과 약을 복용할 때만 해도 이렇게 잘 울진 않았는데. 마음에 가 닿는 노래를 들어도 울고 진로 고민을 해도 운다. 뿐만 아니라 누가 울면 따라 울기도 한다. 이것은 인간 사회에서의 적자생존에 아주 불리한 특성이다. 감정은 성공에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 최대한 합리의 편에 서야 됨을 알고 있다. 엄마는 뭐가 뭔지 잘 모르겠지만, 종전의 니체주의, 포스트 모더니즘은 사회를 '감정적이어도 되는 공간'으로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 흐름에 엄마는 몸을 맡긴 것 뿐이었다. 감성적인 아이가 뭔가 더 좋아보이니까.

 

감정, 감성, 직관이 본인에게 해가 되는 이유는, 이 세상에는 합리적인 인간도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인간이 스케이트를 타고 빙판을 달린다면, 감정적인 인간은 운동화를 신고 평지를 달리는 것과 같다. 감정이라는 마찰력이 없기 때문에, 합리적인 인간은 조금 더 빨리 원하는 지점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의 최종 목표를 명예나 돈이 아닌 행복에 놓는다면, 당연하게도 감정은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그런 류의 기득권 세력을 강화시켜주는 사상에는 별 관심이 없다. 나는 무조건 성공해야 한다. 물론 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늙는다면 '맞아, 행복하게 사는 게 답이지'라고 생각할 수는 있으나, 나는 이것 역시 일종의 합리화라고 본다. 성공할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정해져 있고, 게다가 소수이므로, 나머지 성공하지 못하는 자들이 만들어낸 변명인 것.

 

나의 전애인은 합리만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나의 모든 후천적 성향이 전애인으로부터 온 것이므로, 내가 합리성을 추구하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부분이다. 그 애는 아주 오래 전에 스스로 터득했다고 한다. 내가 문학을 계속 했었다면 이런 감정적인 부분은 오히려 글의 추진력을 강화시켰겠지만, 나는 지금 천문학으로 진로를 또 다시 틀어놓은 상황이다. 개인적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도 이런 불균형한 상황에서 감정은 더욱 좋지 않은 요소이다. 또한 이과 계열의 사람으로서도, 감정적인 부분을 배제해야 과학적 사건의 본질을 좀 더 꿰뚫어 볼 수 있으리라. 다행인 것은 전애인이 내가 합리성을 가지게 되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때론 누군가의 평가가 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길이 되니까. 프랑스에서의 하루가 다시 지나가고 있다. 내일은 반드시 학원에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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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감각의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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